쉴만한 물가

찢어진 우산

   영국의 “메리” 여왕이 구름이 낀 어느 날 왕궁을 떠나 산책을 하다가 비를 맞게 되었 습니다. 그래서 비를 피할 곳을 찾다가 한 오두막집을 발견하고 급히 피해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여주인에게 우산을 빌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오두막 여주인은 여왕을 이리저리 훑어보고서 안으로 들어가더니 아주 오래되고 살이 부러지고 구멍이 난 우산을 들고 나와서 건네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신사 한 사람이 어제 주었던 그 낡은 우산을 도로 가지고 와서 말했습니다. “여왕 폐하께서 어제 주신 우산을 고맙게 썼다고 하시면서 이것을 전해 주라고 하셔서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오두막집 여주인은 그 신사의 말을 듣는 순간 온 몸이 굳어지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의 상실과 회복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유행가 중에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는 인생의 허무함을 노래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 인생은 허무한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 인간은 모두가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존재들인 것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인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면 문제를 일으키고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며 자신도 불행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와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을 배신한 첫 인간의 부패성을 유전 받았으며 계속해서 마귀의 거짓된 말에 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신앙인의 요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떠한 풍파가 일어나도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신앙인의 자세를 집을 짓는 비유를 들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7:24-25)”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수많은 문제들을 만나고 고통을 겪으며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행하며 요행수를 바라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건강한 삶을 사는 길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또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불행의 근본원인

   자신을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불행의 원인과 이유를 자기 밖에서 찾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심지어는 자기 부모, 자녀, 형제자매, 친구, 직장 동료들로 인하여 불행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사람들은 행복의 조건을 비정상적인 것에서 찾으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같은 사람들은 일생동안 무슨 일을 만나든지 불평하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불행의 원인이 바로 불평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첫 인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에덴 동산의 풍족한 조건에서 살았으나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 불평함으로서 불행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불평하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행하시는 능력을 직접 지켜보았고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십자가를 지시는 현장에서는 너무도 약한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언약하셨으며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의 세례와 충만함을 받고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역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에 충만한 제자들이 그들의 원하는 대로 성령님의 능력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도록 쓰임 받게 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도 성령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쓰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곧 바로 손을 씻으시오"

    미국 플로리다 주의 큰 저택에는 그 규모와 장식품들이 유명해서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침대가 너무나 화려해서 침대 커버의 레이스를 만지려고 하다가 손을 멈추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앞에 ‘이것을 만지면 곧 바로 손을 씻으시오’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입니다. 깜짝 놀란 구경꾼은 그 집에서 나오면서 관리인에게 그 침대에 무슨 약이 묻어 있기에 바로 손을 씻으라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관리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냥 손대지 말라고 하면 더 만지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써놓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묵상하면서 많은 경고문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강력한 경고를 하실까?’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죄 짓는 일을 철저하게 막아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왜 내가 하지 못하는가

  옛날에 대표적인 코미디언 두 사람이 찍은 라면 광고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형님 먼저, 아우 먼저”하다가 결국에는 “그럼 내가 먼저”라면서 라면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친구 목사님이 카톡으로 복음 송을 보내주었는데 “왜 내가 먼저 못 하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왜 내가 먼저 사랑하지 못하고 왜 내가 먼저 봉사하지 못하고 왜 내가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하고 왜 내가 먼저 감싸주지 못하고 왜 내가 먼저 다가가지 못 하는가”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내 자신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면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새롭게 다짐해 보았습니다. 성도님들 모두 때가 지난 후 왜 내가 먼저 하지 못했는가라는 후회가 없기를 기원합니다.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

  요즘 우리 사회를 들끓게 한 소위 신천지 이단을 보면서 근본적인 문제점을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을 묵상해 보면 거짓 선지자들은 이미 구약시대에도 있었고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으며 사도들이 사역했던 초대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이 같은 이단과 사이비들의 공통된 점은 모두가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고 거짓된 말로 속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거짓 가르침에 빠지는 이유가 너무도 단순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따르게 되고 또한 특별한 단체에 소속되기를 기대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소속감과 유대감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단들은 교회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신자들을 공략하여 특권을 강조하며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빠지기 쉬운 것이 곧 악하게 살면서도 남들보다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여 지는 사람들로 인하여 마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정말로 선하게 살아야만 하는가?’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통하여 ‘불량하고 악한 자는 구부러진 말을 하고 다니며 눈짓을 하며 발로 뜻을 보이며 손가락질을 하며 그의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며 다툼을 일으키는 자라 그러므로 그의 재앙이 갑자기 내려 당장에 멸망하여 살릴 길이 없으리라’(잠6:12-15)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방호복과 하나님의 전신갑주

  지금 전 세계가 코로나19 전염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전염성이 너무 강해서 이 병을 방역하는 사람들이나 치료하는 의사 모두가 불편하지만 전염되지 않기 위해서 방호복을 입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 성도들은 악한 마귀를 대적하여 이기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3-17)고 권면합니다.

꽃에게 미안했습니다

   우리 집에는 화분이 몇 개 있는데 다 오래된 것들입니다. 그 중에 난 화분이 두 개 있는데 봄철이 되면 가녀린 꽃대가 올라와서 꽃을 피웁니다. 올 해도 역시 꽃을 피웠는데 물을 주어야할 시간이 지나서인지 꽃 봉우리가 제대로 피어나지 못했습니다. 때가 늦었지만 물을 흠뻑 주면서 마음이 저렸습니다. 꽃을 보기 위하여 화분을 놓았다면 때를 맞춰서 물을 주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그 일을 제때 하지 않은 것이 미안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같은 실수가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해서도 나타난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 될 것인가를 마음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일이 있고 사람들과 자연에게 해야 할 일이 있으며 그런 일은 때가 있습니다. 모든 일은 때를 놓치면 미안한 결과를 낳고 맙니다. 

친구의 권면

   옛날에는 치즈는 서양 사람들이나 먹는 것으로 알았는데 지금은 우리의 식탁에도 자주 오르는 음식재료가 되었습니다. 치즈 중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치즈가 바로 “크라프트 치즈”입니다. 이 치즈는 그 제조자인 ‘크라프트’(J. L. Kraft)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그는 원래 가난했는데 신앙생활을 하고 성실하게 살면서 치즈 공장을 차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사업이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치즈가 팔리지 않아서 공장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그때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전화를 했는데 친구로부터 뜻밖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 친구는 ‘나는 자네가 망할 줄 알고 있었네 자네가 사업이 잘되다보니 주일을 바로 지키지 않는 것을 보고 망할 줄 알았어’라고 했습니다. ‘크라프트’는 친구의 얘기를 듣고 곧바로 주일을 성수하였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해야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마음이 열려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마음이 열려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미움이 앞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갈등이 생기고 싸움까지 하게 되어서 서로가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이 같은 현실에서 사람들은 싫어지고 미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면서 싫으면 내가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 중에도 세상 사람들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믿음과 아들의 순종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100세 때에 주신 아들 이삭을 소년이 되었을 때에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고 명하셨습니다. 번제는 제물의 목을 치고 살과 뼈를 분리하여 불에 태워서 드리는 제사였는데 이삭을 그렇게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금치도 불평하지 않았고 그 아들 이삭은 분명히 제물이 없는데도 아버지의 행동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같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신앙자세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히11:17).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했고 그 아들 이삭은 그 아버지의 믿음의 행위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잡초 한포기를 보면서

 우리 집에는 몇 개의 화분이 있는데 거의가 아주 오래된 것들입니다. 그런데 물 줄 때를 놓치면 이파리가 힘을 잃고 축 늘어지다가 다시 물을 주면 언제 그랬느냐는 것처럼 팔팔하게 일어서는 것을  보면서 생명력의 신비함을 절감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이상한 잡초 한 포기가 바로 베란다 물통바로 옆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아파트 같은 다주택의 구조에는 옥상에서부터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통이 있는데 그 통 안으로 폐수가 흘러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물통 옆에 이름 모를 잡초 한포기가 자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것을 보면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6:30)라고 책망하신 말씀의 뜻을 절감했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통계가 있는데 세계적인 기구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가 자살률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30명 이상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고 있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이 같은 안타까운 현실에서 우리는 당연히 그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실의  이유로 경제적인 어려움, 애정관계, 질병문제, 사회적인 문제점에 대한 저항 등등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들고 있습니다. 물론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는 사람들을 함부로 비난해서는 안되지만 적어도 우리 성도들은 자신의 가치를 바로 알아야 하는데 곧 우리의 생명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로 알 때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고 노래한 것처럼 우리도 힘 있게 그리고 넉넉하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기 위해서 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노력하는 것을 사람들은 생존경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인생은 결코 혼자만 살아갈 수 없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잠시 동안 휴식이나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 홀로 산속이나 섬에서 머무는 일이 있지만 역시 혼자서만 산다는 것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찬송가 373장을 보면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소리 뿐일세”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맹세

   어떤 여인이 중병이 들어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문안을 온 성도에게 기도를 부탁하면서 맹세를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의 병을 고쳐 주시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 주시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겠습니다. 또한 자녀들도 신앙생활을 하게하며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놀랍게도 그 여인은 회복되어서 몇 개월 동안 맹세를 지켰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옛날에 함께 놀던 술친구들과 어울려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차를 몰고 가다가 전봇대를 받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그 여인처럼 하나님께 대한 맹세를 저버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39년만에 찾은 딸

   지적 장애를 가진 8살 딸이 크리스마스이브 날 충남 천안에서 실종되어 노숙 생활을 하며 48살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76세)와 감격적으로 만났습니다. 실종 당시 가족들은 주변의 아동 보호시설을 샅샅이 찾았지만 찾지 못했는데 세월만 무심하게 흘렀습니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지난 6월 딸을 찾기 위해서 유전자 등록을 하였습니다. 3개월 후에 서울 수서경찰서 관내 서울시여성보호센터에 거주했던 그녀와 친자 관계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난 8월에 보호센터에서 퇴소하였는데 지난 10월 31일 밤 서울역을 배회하던 그녀가 발견되었습니다. 39년 만에 만난 딸은 어릴 적 그대로 손톱을 깨물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도 끝까지 우리를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순교를 택한 163명

   한 중국 청년이 미국에서 좋은 대학을 졸업한 후 높은 관리직에 올 것을 제의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회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그렇게 좋은 자리를 마다하고 고생되는 목회자의 길을 택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중국에서 체험했던 사건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 중국 내륙 지방에서 살았는데 의화단 사건이 발발했고 군인들이 몰려와서 우상에게 절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를 포함한  동네의 성도들 163명이 모두 목 베임을 당하여 순교했습니다. 나는 그때 어린 아이였지만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는 목회자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한 어린 아이의 눈앞에서 끝까지 신앙을 지킨 성도들의 순교가 그로 하여금 목회자의 길을 선택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인디언의 신앙고백

   미국 상원의원이었던 “로버트 케네디”가 브라질 내륙 지방을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많은 원주민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아주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신자였습니다. “케네디”는 호기심으로 통역관을 통하여 “당신이 가장 즐겨하는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서슴없이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고 그를 찬양하는 일이 가장 즐겁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케네디는 그가 잘못 들은 줄로 알고 똑같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아주 분명하게 똑같은 대답을 하였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또는 자기 자신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상처를 치유하면 더 빛이 납니다.

   옛날에 어느 나라에 보석을 좋아하고 모으는 임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임금이 무척 아끼던 다이아몬드에 흠집이 생겼습니다. 화가 난 임금은 자신이 아끼던 금강석에 상처를 내게 한 사람이 누구냐면서 당장 원상복구를 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신하들은 모두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하여 걱정을 하고 있는데 한 신하가 자신이 상처 난 금강석을 더 빛나게 하겠다고 장담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집으로 가져가서 상처가 난 부분을 열심히 연마했습니다. 그랬더니 금강석이 더욱 맑아지고 빛이 났습니다. 임금은 아주 기뻐하면서 그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신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한데 상처를 갈면 된다고 대답하면서 우리들의 상처도 사랑으로 치료하면 더욱 빛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권세가의 말로

   지난 시대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 제국의 공화정 말기에 유명한 정치가이며 장군이었던 “시이저”(Gaius Julius Caesar, B.C 100-44)가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참으로 너그러운 인물이었는데 그의 권세가 강해지고 지위가 높아지자 무소불위의 권세를 휘둘렀습니다. 결국 로마의 원로회의장에서 정적들의 칼에 수없이 찔려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통 중에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친아들처럼 아껴주던 “부르투스”에게 칼을 맞으면서 “너도냐?”라고 물었습니다. 이같은 역사적인 사실은 우리들에게 권세의 무상함과 헛됨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도 무모한 권력자들의 참담한 말로를 눈으로 보면서 우리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눈물의 신앙자세

  옛날에는 거의 모든 성도들이 목청이 터지도록 소리를 높여서 예배당이 떠나 갈 것처럼 기도하고 눈물바다가 되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러나 요즘 교회들과 성도들을 보면 눈물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것만 같습니다. 다윗은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고 했으며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42:3)”고 했고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 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56:8)”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기도 자세를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견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고 증거 했습니다.

지금 시간이 유일한 기회

   유명한 전도자 무디(D.L Moody.1837-1899)가 시카고의 교회에서 어느 주일에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마7:22)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마친 후에 “다음 주일에 다시 교회에 오실 때에 여러분 각자가 예수님을 어떻게 하실지 결단을 내려 보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밤, 시카고 대화재가 발생하여 설교를 들었던 성도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무디”는 후에 그 날의 사건을 되돌아보면서 설교를 한 직후 바로 예수님께 대한 결단을 촉구하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런 일들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설교자도 바로 결단을 촉구하지 않는가하면 성도들도 결단을 미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위대한 발견

    많은 사람들은 수술용 마취제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를 잘 알지 못하며 또한 그의 신앙에 대해서는 더욱 모르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수술용 마취제를 만든 인물은 “심프슨 경”(Sir James Joung Simpson 1811-1870)이었습니다. 그는 빵을 만드는 직공의 아들로 태어나 14세 때에 “에든버러” 대학 산과학과에 입학하였고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빗대를 취하셔서 하와를 만드신 것(창2:21-22)에 착안하여 1847년 “클로르포름”이라는 마취제를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가장 위대한 발견을 했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나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엇입니까?

갈곳을 모르는 사람

   많은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데 한 사람은 그들의 뒤를 지켜보다가 자기 혼자가 되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가야할 집이 없는 방랑자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처럼 우리 주변에는 이 세상의 삶이 끝나는 순간 자신이 가야할 곳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구세군 창설자 “윌리엄 부스”가 전도를 하는데 도무지 믿지 않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집을 지나가는데 식구들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 가운데 아버지가 죽어가는 아들에게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고통이 곧 끝날 것이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버지는 참으로 무책임한 사람이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세상에는 주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집(요14:1-3)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보람된 투자

    미국의 “소피아”라는 여성이 200달러짜리 복권에 당첨됐습니다. 그런데 마침 길에서 구걸하는 노숙자를 만났습니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를 카페로 데리고 가서 커피를 사주었습니다. 그 노숙자는 3년 동안 이처럼 따뜻한 배려는 처음이라고 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이틀 치 숙박비도 주고 복권 당첨금을 다 썼습니다. 그러자 그 노숙자가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해서 그것을 SNS에 올려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한 이발사가 찾아와서 무료로 이발을 해주고 새로운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그를 돕겠다는 후원금이 1만 3800달러가 모금되었습니다. 그 돈은 복권 당첨금 200달러의 700배가 되는 액수였습니다. 한 여성의 사랑의 투자로 희망을 잃고 길거리에서 방황하고 구걸하던 사람이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침묵의 의미와 가치

    말(언어)은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크신 선물입니다. 말을 통하여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일도 함께 합니다. 또 말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위로를 주며 일으켜 세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값진 선물인 말을 악용하고 오용함으로서 너무도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을 주시면서 동시에 침묵하는 자세의 가치를 가르쳐 주신 것을 보게 됩니다. 구약성경 여호수아 6장을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때, 6일 동안 침묵하고 성을 돌고 7일째 되는 날에 나팔을 불고 외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침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눈이 되고 발이 되어

    KBS TV 프로그램 중에 “동행”이라는 것이 있는데 방영되는 사연들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고도 시원하게 해 줍니다. 얼마 전 방영된 내용 중에 남편은 교통사고를 당하여 제대로 걷지 못하고 아내는 눈이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진 부부의 사연이었습니다. 이들은 둘 다 서울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다가 만나서 부부가 되었는데 서울 어느 교회에서 마련해준 쪽방에서 살면서 자신들의 처지를 원망하지 않고 보람된 일을 하자고 다짐하였습니다. 모든 조건이 갖춰진 부부들이 못살겠다고 서로 싸우는 현실에서 시력이 있는 남편은 볼 수 없는 아내의 눈이 되고 아내는 볼 수 없지만 남편의 발이 되어 사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으며 그들에게 방을 마련해주고 도움을 주고 있는 교회에 하나님의 더 큰 은총이 임하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 영혼에 해를 끼치는 것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고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에 해를 끼치는 것들이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육체적인 욕심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고 권면했습니다. 둘째로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듣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하니라(벧후2:8)”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셋째로 악한 사람들과의 교제입니다. 솔로몬은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들의 입술은 재앙을 말함이니라(잠24:1-2)”고 했습니다.

어느 이슬람교 신자의 개종

   이슬람교의 열렬한 신자 한 사람이 생명의 위협을 느꼈으나 자신이 기독교
신자가 된 이유와 사연을 고백했습니다. 이슬람교의 지도자들이 아주 엄중한 어조로 심문을 했습니다. “그대는 어떻게 해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는가?” 그러자 그 신자는 이슬람교 지도자들에게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저는 세상을 살다가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길을 찾기 위해서 헤매다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산 사람이었습니다. 이럴 경우에 어떤 사람에게 길을 물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러자 이슬람교 지도자들은 모두가 같이 말했습니다. “그거야 당연히 산 사람에게 물어야지”. 그러자 그는 아주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죽은 마호메트에게 길을 물을 수가 없어서 살아있는 예수님께 내 길을 물어 보았습니다.”

바람에 꺼진 호롱불

   이솝 우화 중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기름을 많이 빨아들여 제법 환하게 된 호롱불이 자신의 빛을 뽐내면서 말했습니다. “자 이만 하면 하늘에 있는 달은 물론 해보다도 내 빛이 더 밝지 않은가”. 그때 마침 지나가던 바람이 호롱불을 꺼버렸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다시 호롱불을 켜면서 “네가 얼마나 잘 났다고 까부는 것이냐 하늘에 있는 것만 꺼지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을 살펴보면 조금 가진 것을 가지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자랑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조금만 높은 자리에 앉게 되면 하늘에 오른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거드름을 피웁니다. 이는 모두가 자신이 지음을 받은 존재라는 것을 바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인 것입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만 듣습니다.

   “야고”라는 팔레스타인 선교사가 어느 날 브엘세바 지역을 지나가다가 양들이 돌무더기 사이의 풀을 뜯고 있는 것을 보고 목자들에게 양들을 어떻게 모으느냐고 물었더니 소리로 한다고 하면서 그 소리 내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선교사는 목자들의 옷을 빌려 입고 아주 근사하게 소리를 냈지만 양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목자가 소리를 내자 양들이 일제히 목자에게로 달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선교사는 예수님께서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10:2-5)”는 말씀의 의미를 절감했던 것입니다.

씨앗을 팝니다.

    어느 성도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계속하여 기도하던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은 너무도 생생해서 꿈을 깨고 난후에도 그 내용이 분명하게 남았습니다. 그 꿈은 곧 천사들이 상점을 열고 장사를 하는데 그 성도가 첫 번째 가게에 가서 능력을 사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우리 가게에서는 씨앗만 판다고 했습니다. 그 성도는 두 번째 가게에 가서 사랑을 사고 싶다고 하자 그 천사도 우리 가게에서는 씨앗만 판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성도는 세 번째 가게에 가서는 천사에게 이곳의 모든 가게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팔지 않고 씨앗만 판다고 하는데 대체 그 씨앗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천사는 우리가 파는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말씀을 씨앗처럼 심으면 약속된 모든 열매가 풍성하게 맺혀지는 것이라고 대답해 주더라는 것입니다.

용서 구하기를 기다린 할머니

  한 소년이 누이동생과 함께 새총을 가지고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가장 아끼시는 오리를 쏘아 맞혀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소년은 죽은 오리를 땅에 몰래 묻고서 누이동생에게 비밀을 지켜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누이동생은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비밀을 폭로하겠다고 협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어느 날 할머니에게 울면서 자신이 행한 일을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손자에게 “나는 네가 오리를 죽인 것을 다 알고 있었고 네가 말하기를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단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손자를 힘껏 안아 주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서 그것이 탄로가 나지 않기를 바리지만 마귀는 우리들을 고발하면서 계속하여 괴롭힙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죄악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의 입으로 고백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